조훈현과 이창호, 스승과 제자의 전설적인 승부 이야기
바둑을 잘 모르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조훈현과 이창호입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바둑 고수와 제자의 관계를 넘어, 한국 바둑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스토리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최근 OTT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이들의 이야기가 재조명되며 다시 주목받고 있는데요, 실제 역사 속 이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승부’라는 단어가 지닌 깊은 의미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조훈현 9단, 바둑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조훈현은 한국 바둑의 1세대 프로기사로, 바둑의 대중화를 이끈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1953년생인 그는 9세 때 바둑을 시작해 천재성을 인정받았고, 12세 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당시 일본은 세계 바둑의 중심지였으며, 조훈현은 그곳에서 일본 바둑계의 거장 사이에서 실력을 갈고닦았습니다.
그의 일본 시절 스승은 ‘다카가미 슈코’로, 냉정하고 치밀한 바둑 스타일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조훈현 역시 철저한 계산과 냉정한 수읽기로 일본 프로기사들을 제치고 최연소 입단에 성공했으며, 한국 귀국 후에는 독보적인 실력으로 1980~1990년대 바둑계를 장악하게 됩니다.
특히 조훈현은 국내 바둑계에서 ‘조사범’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냉철하고 단단한 이미지로 통했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마음의 문을 연 제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창호입니다.
이창호, 조용한 천재의 등장
이창호는 1975년생으로, 7살 때부터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천재성은 곧 업계에 알려졌고, 결국 조훈현의 문하로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조훈현은 자신만의 엄격한 기준으로 제자를 선발했고, 이창호는 유일하게 그 기준을 충족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이창호는 평소 말수가 적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바둑판 앞에서는 누구보다 집중력과 침착함을 보였습니다. 그의 바둑 스타일은 '무서운 수읽기', '흔들림 없는 진행'으로 요약됩니다. 조훈현은 처음부터 이창호가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전합니다.
1990년대 초반, 바둑계의 권력 교체가 시작되다
1992년, 제40기 국수전은 바둑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순간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이창호는 17세의 나이로, 스승 조훈현과 국수전 결승에서 맞붙습니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조훈현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이창호가 스승을 상대로 3대 0 완승을 거두며 타이틀을 가져간 것입니다.
그 순간은 단순한 ‘이변’이 아니었습니다. 스승을 넘는 제자의 이야기이자, 바둑계 세대교체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조훈현은 그 자리에서 “이제 내 시대는 끝났고, 이 아이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았습니다.
라이벌이 된 스승과 제자
이후 이창호는 국내 모든 주요 타이틀을 석권하며 ‘국민 바둑 천재’로 자리매김합니다. 일본과 중국의 강자들과의 대결에서도 승리를 거듭하며 세계 최강의 기사로 떠오릅니다. 동시에 조훈현은 그와 여러 번 결승에서 만나며 경쟁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1990년대 후반, 이 두 사람은 국내 대회 결승에서 무려 15차례나 맞붙으며 바둑 팬들에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를 연출했습니다.
이창호는 스승을 향한 존경심을 한 번도 잃지 않았고, 조훈현 역시 이창호를 진심으로 아끼면서도 결코 승부에서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승부는 냉정하되, 관계는 따뜻하다’는 말을 현실로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와 드라마에선 다 보여주지 못한 이야기
최근 콘텐츠 플랫폼에서는 조훈현과 이창호의 이야기를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로 각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상 매체로는 다 담지 못하는 정서가 있습니다.
예컨대, 이창호는 조훈현의 집에서 함께 살며 밥을 먹고, 똑같은 연습을 하며 바둑을 배웠습니다. 스승은 제자의 옷을 사주고, 늦게까지 바둑을 지도했습니다. 그 과정은 단순한 수읽기와 전략이 아니라, 인간적인 애정과 교육 철학이 어우러진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조훈현은 정치에 입문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고, 이창호는 그런 스승을 항상 존중하며 일정 거리에서 지켜봤습니다. 그들은 나란히 서 있지 않아도 서로를 향한 신뢰를 놓지 않았습니다.
바둑을 넘어선 인생 이야기
조훈현과 이창호의 이야기가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승부의 기록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이기고, 다시 스승을 존경하며 스스로도 스승이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본질적인 성장과 배움의 의미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승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승부란, 끝없이 배우고 도전하며, 누군가를 이기면서도 그를 더 깊이 존경하게 되는 과정이다."
마무리하며
조훈현과 이창호의 스토리는 한국 바둑의 역사이자, 한 편의 대서사시입니다. 그들의 대국은 끝났지만, 우리에게 남긴 감동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바둑에 관심이 없더라도, 이들의 이야기를 접해보신다면 분명 큰 울림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인생의 방향을 고민하시는 분들, 승부 앞에서 흔들리는 분들께 이 이야기를 권해드립니다.